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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특별기획/HMV Artists 100

[일본아티스트Top100] 加山雄三 (#80)


출처 : HMV Japan (http://www.hmv.co.jp)
번역 : PJH (파덕) (http://cafe.naver.com/jjpop) 2004/01/15
 
영원한 젊은 대장 "카야마우조"
여기서는 영화스타로써 그의 역사가 아닌 음악가로써 그의 역사를 클로즈업 합니다.

"카야마유조"는 1937년 4월 11일 카나가와현 효코하마시 코가야 출생.
8살때에는 숙모 치던 "바이엘75번"을 손가락의 움직임만을 보고 오르간으로 칠수있게 디었다. 이 당시 부터 음악에 흠미를 가지게 된것으로 보인다. 어릴적 딕시랜드재즈나 죠대니얼스의 드럼 솔로를 자장가로 듣던 에피소드도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전 일본의 가정에서 이런 음악이 흘러나왔다는 기적적인 환경이 그의 재능을 한층 풍부하게 한 요인이 아닐까 재인식하게 된다.

중학교 당시 통학로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레오니도크로이차" 의 집이 있어 언제나 길을 가다 멈춰스게 되었다. 그 우연이 발전하여 '크로이차'에게 소개 받은 여성에게 피아노를 배워가게되었고 그 당시 처녀작인 "요조라노호시"를 작곡하게되었다.
17세때는 친구들과 스키를 타러  '시가고원'으로 갔었다 그 때 어떤 한사람이 가져온 우클레를 듣고 흥미를 가지게 되 한시간 가량의 코치를 받고 기초를 마스터했었다. 그 후 그 친구의 영향으로 기타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20세가 되자 6인 편성인 '칸토리크롯브스'라는 학생밴드를 결성. 사이드 기타와 보컬을 담당. 밴드의 레파토리는 웨스턴과 로카비리가 대부분이였던것으로 보인다. 주요 연주장소는 '긴자'에 있는 댄스홀이나 학생 파티 미군 '요코타'기지등으로 이 때 '카야마'의 실체험이 '토호' 입사후 "와카다이쇼시리즈" 의 스크린 에 재현되어 흥미로웠다.
당시 에피소드에는 이런것도 있다한다. 1957년 11월 "치가사키" 에 이사온 "카세쿠니히코" 는 "게이오"고등학교 1학년이였다.
어느날 "카세" 는 미식축구부의 선배로부터 배우 "우에하라켄" 의 크리스마스파티에 불려져 태어나 처음으로 양복에 넥타이 모습으로 "우에하라"의 집을 방문하였다. 거기서 당시 '게이오기쥬큐'대학 2학년인 "카야마우조"오 ㅏ만나게 되어 1957년 12월 24일 그 날부터 "카세쿠니히코"의 "더와일드원즈"의 역사가 시작하게되었다 한다.
"카세"는 "카아먀"를 형처럼 흠모하여 "카야마"로부터 써핑, ㅇ트, 그리고 우클레, 기타등을 배웠다. 그 떄 만남은 그 후 40년이상을 걸쳐 계속 되게된다.

1960년 영화 "오토코다이오토코" 에서 첫 데뷔.
'토호'입사후 61년에 '토호' 창립 30주년의 축하 파티때문에 '카야마'는 '후지모토'프로듀스의 명을 받고 '토호' 배우동기들과 밴드를 결성했다. 기타, 보컬의 "카야마"와 "니헤이마사야" (드럼) "아키라츠다" (기타) " 히로유키사타케" (베이스) "시라이시타케토츠" (페달스테일) 라는 라인업으로 폭넓은 레파토리를 연주헀다한다. 밴드이름은 "카야마"가 좋아하는 배가 침수하는 (Lunch) 라는 의미로 "더 런챠즈"라 명명하였다.
더욱이 여러편의 영화에서도 빠른 싀트로 주연을 하게되 영화 "다이가쿠노와카다이쇼"의 공개에 맞춰 "다이카쿠노와카다이쇼/ 요루노타이요오" 로 토시바레코드에서 가수로 데뷔. 게다가 그 다음해에는 영화와 맞추어 "니홍이치노와카다이쇼/ 히토리폿치노코이" 를 발매하였다.

당시 미국에서 주류였던 '테인팝'의 히트곡에 일본어가사를 붙혀 일본인 가수가 부른 커버시대의 창세기로부터 공전의 '일렉붐'과 '그룹사운드붐'의 시대까지 이런 팝 뮤직이 의외로 길게 유행하게되었다. 학생시대에 밴드 경험으로 대중적인 음악을 좋아하게된 "카야마"도 어떻게 보면 이런 커버팝 가수의 이미지가 있지만 그의 음악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음악을 직접체험하여 일절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창조된 것으로 흥미를 키운다.

1962년 영화 "니홍이치노와카다이쇼"의 선전용에 '썬'출판에서 포노시트로 발매되었다. "블루 스위트슈즈" 나 "그린 필드"등 노래에서 이제까지 일부가 "카야마"혼자서 다중 녹음작업으로 제작된것이 사람들을 놀라게하였다.
그리고 1965년 28세에 레코드 "키미토이츠마데모/효조라노호시"를 발매. 이것이 폭발적인 대 히트를 기록하여 레코드 대상 특별상을 수상 다음해에는 여러 레코드를 지속적으로 발매하였다.

30대가 되어서도 계속 발매하여 1970년 33세때 여배우 "마츠모토메구미"와 캘리포니아에 있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열었다. 그 후 영화에서부터 TV쪽으로 온겨가며 음악가로써 작품을 계속 발매하였따.

1986년에 NHK에서 열린 "카야마유조쇼~" 에서 다채로운 게스트가 매회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오랜만에 "카세쿠니히코"등 "와일드원즈" 멤버들과함께 일렉 기타를 연주하는등 모습을 보여 "일렉의 젊은 대장"의 부활도 예감케하였다. 게다가 "카야마"의 60년대 작품이 본격적으로 재 발매가 이어졌다. 정성스럽게 리마스터링에 의해 왕년 "카야마"작품이 새로운 감동을 가지고 부활하여 이미 예전부터 레코드를 가지고있는 팬들도 줄지어 구입하는 현상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이퍼런챠즈"가 결성!.
이제 아이들도 다 크고 기타라도 다시 쳐볼까 하고 생각해보던 때  "더 와일드 원즈"였던 시마에이지"가 "다시 한번 놀아봅시다~" 라며 다시 말을 꺼내 다수의 맴버를 모아 가끔씩 자신의 집에서 놀다가. '한번 콘서트를 해볼까?' 라며  "하이퍼런챠즈"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1994년 2월의 일이였다.

▒ 원문 ▒
永遠の若大将こと加山雄三。
ここでは、映画スターとしての彼の歴史ではなく、音楽家としての彼の歴史をクローズアップしています。
加山雄三は1937年、4月11日神奈川県横浜市幸ヶ谷に生まれる。
8歳には、叔母の弾いていた"バイエルンの75番"を、指の動きだけを見てオルガンで弾けるようになる。この頃から音楽に興味を持ち出していたようです。赤ん坊の時に、デキシーランド・ジャズやジョー・ダ二オルスのドラム・ソ口を子守唄に眠ったというエピソードも、今考えると、戦前の日本の家庭で、こうした音楽が溢れていたという、奇跡的ともいえる環境が、彼のオ能を豊かなものにさせた―因であったことを再認識させられる。

中学生時代、通学路の途中に有名なピアニストのレオニード・クロイツァーさんの家があり、いつも立ち止まっていた。その偶然が発展し、クロイツァーさんに紹介してもらった女性にピアノを習いにいく。同時に処女作「夜空の星」を作曲。
17歳では、友人達とスキーで志賀高原に行き、その中の一人がもってきたウクレレを聞き興味を持ち、一時間くらいコーチをしてもらい基礎をマスターした。その後その友人の影響でギターも手にするようになった。

20歳になり、6人編成のカントリー・クロッブスという学生バンドを結成。サイド・ギターとボーカルを担当。パンドのレパートリーはウェスタンとロカビリーがほとんどであったようだ。主な演奏場所は銀座の貸しダンス・ホールや学生パーテイー、米軍横田基地といったところで、この頃の加山の実体験が東宝入社後の"若大将シリース"のスクリ―ン上で見車に再現され興味深い。
当時のエピソードにこういったものがある。 1957年11月、茅ヶ崎に越してきた加瀬邦彦は慶應高校の1年だった。
ある日、加瀬はアメフト部の先輩から俳優・上原謙のクリスマス・パーティに誘われ、生まれて初めてスーツにネクタイ姿をして上原家を訪ねた。そこで当時慶應義塾大学2年生、あとの加山雄三に出会うのである。1957年12月23日、その日から加瀬邦彦のザ・ワイルド・ワンズの歴史がスタートしたということである。
加瀬は加山のことを兄のように慕い、加山からサーフィン、ヨット、そしてウクレレ、ギターなどを教わった。その付き合いは、その後40年以上にもわたったようである。

1960年、映画「男対男」にてデビュー。
東宝入社後の61年に、東宝創立30周年の祝賀パーテイーのために、加山は藤本プロデューサーの命を受けて東宝の俳優仲間とバンドを結成している。ギター、ヴオーカルの加山と二瓶正也(ドラム)、津田 彰(ギター)、佐竹弘行(ベース)、白石剛敏(ぺダル・ステイール)というラインナップで、幅広いレパートリーを演奏したようだ。バンド名を、加山が好きな船が進水する(Lunch)という意味でザ・ランチヤーズと命名された。
さらに、数々の映画にもの凄いスピードで主演し、映画『大学の若大将』の公開に合わせて、「大学の若大将/夜の太陽」で東芝レコードより歌手デビュー。さらに翌年にも、映画に合わせて「日本一の若大将/一人ぼっちの恋」をリリース。

当時、アメリカで主流になりつつあったテイーン・ポップのヒット曲に、日本語詞をつけて日本人歌手が歌うカバーの時代の創世期で、空前のエレキ・ブームやグループ・サウンズの大ブームの時代までこうしたポップ・ミュージックが意外に長く流行することになる。学生時代のバンド経験からポピュラー音楽を愛好した加山にも、―見、こうしたカバー・ポップ歌手のイメージがあるが、彼の音楽はあくまで米国の音楽を直接体験して、―切のフイルターを通さずに創造されているところが興味深い。

1962年に映画「日本―の若大将」の宣伝用に、サン出版でフォノシートとしてリリースされた、「ブルー・スウェードシューズ」や「グリーン・フイールズ」等の楽曲で、これらの―部が加山ひとりによる多重録音で制作されていることに驚かされる。
そして1965年、28歳の時にレコード「君といつまでも/夜空の星」をリリース。これが爆発的大ヒットを記録し、レコード大賞特別賞を受賞。翌年には数々のレコードを立て続けにリリースする。

30代になってもリリースを続け、1970年33歳の時に女優松本めぐみとカリフォルニアの教会にて結婚式をあげる。その後も映画からテレビ方面に露出は変更しながらも、音楽家としての作品を続々とリリース。

1986年にNHKテレビではじまった「加山雄三ショー」では、多彩なゲストが毎回出演して話題となったが、久しぶりに加瀬邦彦らワイルドワンズのメンバーをバックにエレキ・ギターを演奏する姿も見られるようになり、"エレキの若大将"の復活も予感させたのだった。さらに加山の60年代作品の本格的復刻リリースが盛んに行われるようになった。入念なリマスタリングによって、往年の加山作品が新しい感動をもって蘇ることで、すでにレコードを持っている昔からのフアンも復刻CDを買いに走るという現象が起こった。

そしてハイパーランチャーズになった。
子育ても終えて又ギターでも弾こうかなと思っていたときザ・ワイルド・ワンズの島英二氏に「ベンチャーズごっこやりましょう」ともちかけられモズライトを弾き、数人のメンバーを集めたびたび自宅で遊んでいたところ、一度コンサートをやってみようか!となりハイパーランチャーズ結成に至る。1994年2月頃の事である。